우울감
- 2017년 9월 25일
- 3분 분량
"우울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중요하다."
나는 우울감을 가진 여러 사람을 알고 있고, 그 중 하나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우울감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또 혼자 깊게 생각하는 것이 버릇되어 우울감에 젖어드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들(특히 부모님의 개인 사정 등)을 쉽게 고민하면서 그 깊이와 주기가 깊어지고 늘어났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내 본성은 우울감과 함께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밝은 감성도 함께 가졌다.
쉽게 말하면, 장마전선과 고기압 전선이 함께 있는것이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이 우울감을 억제하기보다는 달래주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도 곧잘 나는 우울해하다가 괜찮아진다.
내 처방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내가 우울감에 쉽게 젖어드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생각한다. 쉽게 우울하고 싫은 소리를 자주 했던 선지자 엘리야를 떠올린다.
사악한 왕 아합의 군정 아래에서 핍박받고 850명의 이단 선지자들과 대결해 이긴 직후에 여왕 이세벨이 자신의 동료들인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 본인에게도 살해 협박을 하자 바로 죽고싶다고 하나님께 고백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하고, 가뭄을 그치게 하는 등의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었음에도 우울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열왕기상 19:4]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햇볕을 쬐거나 오래 걷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살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자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소명이 남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다. 그걸 다 이룰 때까지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곧잘 죽고싶은 생각을 한다. 어떻게 죽으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내 신앙적인 의무감이 나로 하여금 죽지 못하게 한다. 나는 아직 이 땅위에서 이뤄야할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기도하고 잠들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이렇게 말씀하신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5~8]
기분이 나쁠땐 티라미수(이탈리어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적절하다. Cheer me up)를 먹는다. 그리고 좀 많이 걷는다. 한 두 세시간정도. 그러면 잡생각이 없어진다.
우울감도 티라미수와 산책의 초대에 마음이 누그러드는 눈치다.
우울감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우면서 첫 발이 중요한 것 같다. 이 때 첫 발자국은 스스로를 용납하는 일이다.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였다. 그래서 늘 불안해했다.
그 친구(애석하게도 지금은 절교했다)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타입이었고, 연애 스타일도 똑같았다.
상대방이 날 사랑하는지 계속 시험하고 갈구하는 애정결핍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애가 불안정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피사의 사탑처럼,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타이타닉처럼....
나는 그 친구를 안심시켜주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다싶이 스스로 믿지 못하면 주위 사람들의 말은 큰 효능을 가지지 못한다. 병을 치료하는 것의 첫 걸음은 환자 자신의 치료의지다. 나아질거라는 희망이 없으면 치료가 어렵다. 그 친구도 그랬다.
우울감은 전염된다. 그 때문에 나는 되도록 우울한 사람 옆을 떠난다. 매정해보이지만 오래 있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친구의 곁을 우울감 때문에 절교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난 그런 우울감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결함 때문에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건 우울감보다는 신의, 애정어린 우정이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면 불행한 사람 옆을 떠나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이건 서울대 교수가 강연한 제목이기도 하다. 유튜브 댓글에는 매정하다, 야박하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인걸.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과 있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단순한 논리다.
그렇다고 우울한 사람을 당장에 대문 밖으로 쫓아내진 말자. 힘들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위로를 해주면 된다.
나는 곧잘 그래왔다. 위로하는게 좋았다. 나도 위로받기 때문이다. 이 때 주의해야할 점은 내가 그 사람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로를 빙자한 위선은 악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심중을 깨달았을 때, 토할 것같이 역겨움이 밀려온다.
우울감은 내가 나 자신을 용납할 때 달랠 수 있다. 억압하려 하지 말고 수용하자. 그는 내 적이 아니라 내 일부분이다.
댓글